우리 동네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돼지 사육장이 있다.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종종 돼지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집 앞 도로를 지나가는 것을 보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돼지를 대량으로 사육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배설물로 더러워진 분홍색 포동포동한 돼지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갈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진동한다. 그럴 때마다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생각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이 돼지처럼 사육된다면 그도 이렇게 역겨운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빽빽이 트럭에 실린 돼지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돼지는 단지 인간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사육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그 뚱뚱한 동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쁘게(?) 랩으로 싸여서 수퍼마켙 냉동 식품 진열대나 분홍빛 조명의 정육점에서 판매되기 위해 도살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살해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어떤 엄숙한 느낌도 그들이 느낄 공포에 대한 이해나 배려도 없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어둡고 진지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역겨움은 전혀 없다. 살아있는 개체의 죽음이 이렇게 당연한 것이어도 되는 것일까.
돼지는 인간들이 식용으로 섭취하는 동물 중 가장 영리한 동물의 하나이다. 돼지의 지능은 개에 비할 만하며, 개보다 더 우수할 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지능의 높고 낮음이 그 동물의 존엄성과 권리에 영향을 끼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의 도축이나 학대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개는 지적인 동물이고 고통에 민감한 동물이라는 믿음이 개를 학대하고 식용으로 섭취하는 것에 관해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돼지를 학대하고 도축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혐오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돼지 역시 지적이고 민감한 동물이니까. 그리고 현대의 돼지 사육은 정말로 혐오스러운 산업이다. 돼지들이 푸른 언덕을 코를 끙끙거리며 돌아다니는 목가적인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돼지들의 행위 패턴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그들은 안정된 사회 집단을 형성하며,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보금자리에서 꽤 떨어진 곳에 대변을 보는 장소를 마련한다. 그들은 활동적이며, 거의 하루 종일 코를 땅에 대고 먹을 것을 찾아 삼림 지대 언저리를 훑고 다닌다. 암퇘지는 출산을 앞둔 시기가 되면 공동 보금자리를 떠나 각자의 보금자리를 따로 만든다. 적절한 장소를 발견하면 구멍을 파고 풀과 잔가지로 안을 받친다. 거기서 그들은 출산을 하며, 그곳에서 약 9일 간을 살다가 새끼와 함께 집단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동물을 우리가 어떻게 대우하는지 살펴보자.
현대의 돼지 사육장에서 이러한 돼지들의 자연적인 본능과 습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돼지들은 지푸라기나 깔짚도 없는 맨바닥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먹고, 자고,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단지 살만 찌우면 되는 것이다. 지능이 높은 짐승에게 무위(無爲)와 권태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이러한 무미건조한 환경에서 돼지들은 그 권태로 인해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다. 이는 우리 안에서 싸움을 유발하고 그들의 체중을 감소시키게 된다. 따라서 사육자들은 돼지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지 못하도록 그들의 꼬리를 절단하는 방법을 쓴다. 물론 마취제는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 안의 과밀한 수용과 무미건조함은 돼지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돼지 스트레스 증후군(Porcine stress syndrome)"이 그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경직, 부스럼, 숨참, 근심,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타나는 이 증상은 좁은 우리 안의 자연적인 욕구 충족이 저해된 생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돼지들은 그들의 전생애를 보낸다. 그들은 분만 시설에서 태어나서 젖을 먹게 되며 일단 양육장에서 키워지다가 성장-급식 시설에서 도축 무게가 될 때까지 사육된다. 일반적으로 몸무게가 약 220 파운드가 나가는 생후 5-6개월 사이에 시장에 팔려 나간다. 즉, 살해되어 식탁에 오른다.
또한 사육자들은 새끼들을 수유 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암퇘지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렇게 할 경우 암퇘지는 젖분비가 중단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사는 암퇘지와 새끼 돼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우선 어미로부터 떨어져서 쇠창살 우리에 감금된 새끼 돼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포유류는 어미와 자식이 일찍 이별하게 될 경우 양쪽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 또한 이렇게 해서 암퇘지의 출산 횟수를 증가시키는 것은 그를 살아있는 번식 기계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암퇘지들은 임신해 있을 때건 새끼를 돌보고 있을 때건 감금되어 있다. 자연 상태에서의 암퇘지는 여러 시간을 먹을 것을 찾거나, 먹거나, 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매우 활동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감금되고 임신을 위해 수퇘지와 함께 수용되는 잠깐(요즘에는 이것마저도 인공수정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다)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같은 종에 속한 또 다른 구성원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생산 기계로 평생을 좁은 우리에서 외롭게 보내게 되고 결국 살해된다.
단지 우리의 알량한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동물의 자연스러운 삶을 파괴하고 이처럼 잔인하게 사육하고 살해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돼지들은 좁고 더러운 우리 안에서 보잘 것 없는 먹이를 먹으며 자신의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몸무게가 적정선에 다다르게 되면 잔인하게 살해되고 그 시체는 조각이 나서 판매된다. 사육장에서 그들의 사회 활동이나 다른 구성원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은 모두 박탈당한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능도 놀이 욕구도 성적 욕구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한 개체의 일생이 이렇게 다른 잔인한 존재에 의해서 마구 휘둘려 져도 되는 것일까? 정말 토끼의 꼬리는 사냥꾼들이 쉽게 사냥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일까? 이러한 생각들은 나를 괴롭혔고, 적어도 난 나의 이기적인 욕구로 인해 다른 존재가 고통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자도 토끼를 잡아먹으며 호랑이도 소를 잡아먹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약육강식은 자연스럽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며 필요 조건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모든 자연스러운 기회를 빼앗긴 채 사육되고 살해되고 시체마저도 훼손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난 너무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 불쌍한 동물들의 시체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