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만8000여 마리.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웬만한 시(市) 하나쯤은 구성했을 만큼 많은 가축이 열흘 사이에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혔다. 11월28일 경북 안동시 와룡면 양돈 단지에서 발생해 인근 지역으로 퍼진 구제역(소·돼지·양 등 발굽이 2개인 우제류 가축들 사이에 도는 급성 전염병) 때문이다.

구제역 양성 판정을 받은 경북 지역 31개 농장의 가축들과 더불어, 반경 5㎞ 안에 살고 있는 소·돼지가 ‘예방 살처분’되었다. 멀리 떨어진 충남 보령시 돼지 2만5000여 마리는 한 수의사가 안동 구제역 농장에서 신었던 신발을 갈아 신지 않고 방문했다는 이유로 같은 변을 당했다. 경남 창녕군에서도 안동의 돼지 사육 농업 법인이 운영하는 위탁 농장 내 돼지 1398마리가 살처분되었다. 어차피 도축장 벨트 컨베이어 위에 누울 운명이었지만, 이들은 그때까지 보장된 나머지 짧은 생애마저 빼앗겼다.

이번에 죽은 소·돼지만 억울한 게 아니다. 2000년 파주, 2002년 안성, 올해 1월 포천, 4월 강화에서 시작된 구제역 파동에서 살처분 대상이 된 가축 21만8200여 마리 가운데 구제역 양성 확진을 받은 개체는 64마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구제역에 걸렸거나 걸릴 수도 있다는 추측 아래 살처분된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일단 죽여놓고 나서 보니, 구제역 음성 판정이 나온 경우도 허다했다.

일본은 구제역 발생 농가의 가축만 매장

이 같은 상황에서 ‘싹쓸이 살처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염성이 큰 구제역을 조기에 차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지만, 다른 대안을 찾아보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살처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반생명적이라는 것이다. 12월9일 한국동물연합 등 11개 단체는 “구제역 발생 농가의 동물들만 살처분하는 유럽연합·일본 등과 달리, 반경 3㎞ 내의 동물을 싹쓸이하는 우리나라 살처분 정책은 중단돼야 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구제역에 관한 특정 가축 전염병 방역지침’에 따라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은 농장의 가축만을 살처분한다. 구제역 백신 접종을 금지하고 살처분 정책만 펼치던 유럽연합도, 살처분에 따른 환경오염과 동물 복지 문제를 고려해 2003년 의회 지침을 일부 개정해 응급적 백신 사용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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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양돈단지 인근의 구제역 돼지 매몰 현장. 11월30일 광경인데, 오른쪽 경사면에 몇몇 살아 있는 돼지가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구제역 살처분이 행해질 때마다 ‘생매장’ 문제가 자주 지적되었다. 현행법에 따르면 전염병 등으로 가축을 살처분할 때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에 따르며(동물보호법 제9조)’ ‘가축의 매몰은 살처분 등으로 죽은 것이 확인된 후 실시해야(가축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 제25조)’ 하지만, 가축들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산 채로 묻혀버리는 장면이 종종 사람들에게 목격된 것이다. 이원복 동물보호연합 대표는 “지난 10년 사이 구제역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농림부와 지자체 등에 꾸준히 생매장 사례와 살처분 과정에 관한 공식 질의를 보냈지만 ‘법에서 정한 대로 하고 있다’는 답변 말고는 제대로 된 답을 들어본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번 안동 구제역 가축 매몰 현장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돼지들이 여러 신문·방송 카메라에 잡히면서 비슷한 논란이 불거졌다. 12월3일부터 안동시청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가축 생매장을 중단하라”는 민원 글이 쇄도했다. 안동시청 가축방역대책본부 관계자는 “살처분 과정에서 최대한 고통 없이 빠르고 확실한 안락사를 위해 주사제를 사용하지만, 돼지의 경우 개체마다 약물 흡수 시간이 달라 매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라고 해명했다.

매몰 전 가축에게 주입하는 약제도 엄밀히 들여다보면 ‘안락사’용이 아니다. 국내 구제역 살처분에는 근육이완제 석시닐콜린(Succinyl choline)이 사용된다. 그 약물을 과다 투여했을 때의 부작용인 호흡근 마비와 심장 정지를 이용해 매몰될 가축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인데, 동물이 겪는 과정은 결코 ‘안락’하지 않다.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일했던 수의사 유주용씨는 “석시닐콜린은 다른 안락사 약에 비해 아주 싸고 적은 양으로 동물을 죽일 수 있어서 과거에는 종종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동물들이 죽기 직전까지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에 대부분 진정제·마취제와 함께 병용하거나 아예 전문적으로 제조된 다른 약물을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만 이같이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까? 사실 구제역 살처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19세기 대량 축산산업의 기틀을 세운 영국 등 선진국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동물은 치사율이 50%를 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다 자란 동물은 10% 미만에 그치는 구제역은 예로부터 ‘따뜻한 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깔짚을 갈아주고,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며 제대로 돌보기만 하면 보름 안에 완치되는 병’(<대혼란>에서)이었다.

육류 수출에 차질 생길까봐 백신 사용 안 해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고기를 유통시켜야 하는 육류 무역업계 처지에서 구제역은 동물이 낫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낫고 나서도 고기와 우유 생산량을 15~20%나 줄이는 ‘무시무시한 역병’일 따름이었다. 1871년 영국 정부가 구제역을 ‘신고 의무 질병’으로 지정하고 감염(의심) 개체를 살처분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전 세계 축산산업과 자유무역의 덩치가 커지면서 살처분 규모도 어마어마해졌다. 가장 높은 돼지 사육 밀도를 자랑하던 타이완은 1997년 구제역으로 돼지 400만여 마리를, 이미 광우병 발생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던 영국은 2001년 구제역으로 460만여 마리의 우제류 가축을 살처분한 뒤 소각·매몰했다.

구제역은 치료제가 아직 없지만 예방 백신은 있다. 우리나라도 올해 7억여 원을 들여 30만 마리 분량의 예방 백신 완제품을 비축하고, 370만 마리 분량의 백신을 급히 들여올 수 있는 사용권을 확보해놓았다. 하지만 예방주사를 맞아 살처분을 면하고 싶을 가축들에게 백신은 ‘그림의 떡’이다. 청정국 지위 유지와 사후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정부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에만 백신을 사용한다는 방침이기 때문이다. 조인수 국립수의과학검역원 해외전염병과장은 “구제역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청정국 지위를 얻는 데 6개월 이상 시간이 더 걸려 육류 수출에 차질을 빚을뿐더러, 백신 접종 개체가 이후 캐리어(보균 동물)가 되어 다른 동물들을 감염시키지 않는지 등을 일일이 관리해야 해서 그만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라고 말했다.

조옥현 농림부 서기관은 구제역 방지를 위해서는 유입 사전 차단 외에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외국 여행을 다녀온 농장주나 관련 업계 사람들이 입국 시 제대로 신고만 해주면 조기에 구제역을 막을 수 있다”라고 조 서기관은 덧붙였다. 농림부는 이제까지는 권고 사항이던 입국 시 검역 절차를 의무 사항으로 바꾸어, 구제역의 발병 원인을 제공한 가축 소유자 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가축전염예방법 개정안’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바람에도 전파된다는 연구 사례가 있는 전염성 강한 구제역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은 “유전적 다양성과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아이스크림 기계처럼 가축을 만들어내는 축산업 구조, 맛있고 값싼 고기를 찾는 소비자의 습관을 바꾸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생물학적 유행병을 다룬 책 <대혼란>(알마 펴냄)의 저자 앤드루 니키포룩은 “과밀도 공장형 사육 시설과 살아 있는 동물의 대량 이동을 줄이지 않는 한, 병원균이 놓은 불에 깡그리 불타버리는 농촌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안동의 구제역 확산이 주춤하던 12월8일, 농림부는 전북 익산에서 포획된 야생 청둥오리 한 마리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검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조류독감은 지난 10년간 국내 축산 농가 조류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에 이르게 한 바가 있다. 12월9일에는 타이완의 30대 남성이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나왔다. 동물의 공포, 식품의 공포, 살처분의 공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