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도축 법제화에 대해 환경운동단체의 입장을 밝힌다 !!
얼마 전 우리사회에서 위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개고기도축을 법제화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국회에 입법안이 발의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재난이 초래한 생명위기의 시대에 개고기도축은 단지 먹거리 문화의 영역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최소한으로나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과거 우리사회 일각에서 보신탕을 즐기는 것이 문화적으로 용인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기류는 형성되어 있다. 반면 서구 선진국은 보신탕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 이에 서양 일각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단순히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다. 자신들의 선진문화가 우월하다는 시각에서 취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빗나간 것이다. 대체로 문화적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의 내용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문화인류학에서 보고하고 있듯이 뉴기니아의 마링부족과 브라질의 야노마모부족이 자신의 문화권 내에서 여아유기를 통한 살해와 여성학대를 도덕적으로 용인하고 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부에서 한때 노예제를 문화적으로 허용했다고 해서 그 행위와 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화를 초월해서 한 문화권의 제도와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개고기도축과 여성차별 및 인종학대는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음식문화인 반면, 후자는 인간차별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차이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면 모든 음식문화는 존중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자행되었던 적이 있는 특정 지역의 식인문화는 어떤 그럴 듯한 궤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신탕문화가 식인문화와 또한 성격을 달리 한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전자는 인간과 동물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인간간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환경운동단체는 말할 충분한 자격을 갖게 된다고 확신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초래된 환경재난과 그에 따른 위기는 산업사회의 자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해야 할 도구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즉 자연을 자원(resources)으로만 간주한다. 그 결과 생명위기를 고조시키는 환경재난이 빈번해진 것이다.
산업주의 이념은 서양의 지배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에서 초래된 것인데, 이것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과 우열에 따른 지배논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월한 주체로서 지배계급 백인 남성이 그보다 열등한 피지배계급 유색인종 여성을 도구와 대상으로 차별함으로써 계급문제와 인종문제, 여성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구조 속에서 우월한 주체로서의 인간이 열등한 대상으로서 동식물 및 자연을 억압하여 환경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선상의 문제 인식에 이르면, 우리는 인간이 함부로 인간 이외의 자연적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환경위기 시대에 인간은 자연을 생명의 원천(sources of life)으로 여겨야 하며, 그런 선상에서 인간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적 존재를 가능한 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초래했음에 비추어볼 때, 비록 먹거리라고 해도 동물을 과도하게 탐식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동물학대를 삼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른 먹거리가 충분한 데, 보신용으로 뱀과 두꺼비, 호랑이, 곰 등을 살육하고 잡아먹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군다나 개는 우리와 정을 가장 가까이 나누는 동물이다. 한편으로 정을 나누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정에 반하는 짓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심성을 사납게 한다.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우리는 과거와 다르게 모든 사회․환경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슈바이처가 외친 것처럼, 우리는 생명 존중의 조망을 갖고자 한다. 이런 조망에서 우리는 지금 진행되는 개고기도축 법제화에 대해 다소간의 우려 속에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태계의 동식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먹이사슬체계에 따라 포식 및 피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생기(Vitalneeds)적 필요에 따라 동식물을 먹이로 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꼭 필요한 경우라면, 개고기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과욕과 탐식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점의 개고기도축 법제화는 위생문제로 포장된, 과욕과 탐식의 음식문화를 법적으로 인정․확산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고기 도축 법제화는 개고기가 부위별 포장육이 되어 슈퍼마켓에 전시되고 한국산 개고기 햄이 전세계로 수출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고기도축법제화의 문제는 단순히 ‘개고기를 먹는다, 안 먹는다’ 식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공공연히 인정하는 대량도축품목으로 소․돼지․닭 등과 함께 ‘개’를 추가하는 사회적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개고기도축 법제화에 반대의사를 밝히는 바이다. 나아가 우리는 인간이 생명 존중심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가 당면한 모든 사회․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다고 여긴다.
1999. 12. 3
환경정의시민연대 환경정의포럼 공동운영위원장 조명래․한면희
녹색연합 배달환경연구소 소장 차명제
얼마 전 우리사회에서 위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개고기도축을 법제화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국회에 입법안이 발의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재난이 초래한 생명위기의 시대에 개고기도축은 단지 먹거리 문화의 영역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최소한으로나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과거 우리사회 일각에서 보신탕을 즐기는 것이 문화적으로 용인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기류는 형성되어 있다. 반면 서구 선진국은 보신탕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 이에 서양 일각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단순히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다. 자신들의 선진문화가 우월하다는 시각에서 취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빗나간 것이다. 대체로 문화적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의 내용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문화인류학에서 보고하고 있듯이 뉴기니아의 마링부족과 브라질의 야노마모부족이 자신의 문화권 내에서 여아유기를 통한 살해와 여성학대를 도덕적으로 용인하고 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부에서 한때 노예제를 문화적으로 허용했다고 해서 그 행위와 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화를 초월해서 한 문화권의 제도와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개고기도축과 여성차별 및 인종학대는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음식문화인 반면, 후자는 인간차별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차이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면 모든 음식문화는 존중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자행되었던 적이 있는 특정 지역의 식인문화는 어떤 그럴 듯한 궤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신탕문화가 식인문화와 또한 성격을 달리 한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전자는 인간과 동물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인간간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환경운동단체는 말할 충분한 자격을 갖게 된다고 확신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초래된 환경재난과 그에 따른 위기는 산업사회의 자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해야 할 도구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즉 자연을 자원(resources)으로만 간주한다. 그 결과 생명위기를 고조시키는 환경재난이 빈번해진 것이다.
산업주의 이념은 서양의 지배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에서 초래된 것인데, 이것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과 우열에 따른 지배논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월한 주체로서 지배계급 백인 남성이 그보다 열등한 피지배계급 유색인종 여성을 도구와 대상으로 차별함으로써 계급문제와 인종문제, 여성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구조 속에서 우월한 주체로서의 인간이 열등한 대상으로서 동식물 및 자연을 억압하여 환경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선상의 문제 인식에 이르면, 우리는 인간이 함부로 인간 이외의 자연적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환경위기 시대에 인간은 자연을 생명의 원천(sources of life)으로 여겨야 하며, 그런 선상에서 인간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적 존재를 가능한 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초래했음에 비추어볼 때, 비록 먹거리라고 해도 동물을 과도하게 탐식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동물학대를 삼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른 먹거리가 충분한 데, 보신용으로 뱀과 두꺼비, 호랑이, 곰 등을 살육하고 잡아먹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군다나 개는 우리와 정을 가장 가까이 나누는 동물이다. 한편으로 정을 나누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정에 반하는 짓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심성을 사납게 한다.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우리는 과거와 다르게 모든 사회․환경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슈바이처가 외친 것처럼, 우리는 생명 존중의 조망을 갖고자 한다. 이런 조망에서 우리는 지금 진행되는 개고기도축 법제화에 대해 다소간의 우려 속에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태계의 동식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먹이사슬체계에 따라 포식 및 피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생기(Vitalneeds)적 필요에 따라 동식물을 먹이로 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꼭 필요한 경우라면, 개고기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과욕과 탐식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점의 개고기도축 법제화는 위생문제로 포장된, 과욕과 탐식의 음식문화를 법적으로 인정․확산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고기 도축 법제화는 개고기가 부위별 포장육이 되어 슈퍼마켓에 전시되고 한국산 개고기 햄이 전세계로 수출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고기도축법제화의 문제는 단순히 ‘개고기를 먹는다, 안 먹는다’ 식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공공연히 인정하는 대량도축품목으로 소․돼지․닭 등과 함께 ‘개’를 추가하는 사회적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개고기도축 법제화에 반대의사를 밝히는 바이다. 나아가 우리는 인간이 생명 존중심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가 당면한 모든 사회․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다고 여긴다.
1999. 12. 3
환경정의시민연대 환경정의포럼 공동운영위원장 조명래․한면희
녹색연합 배달환경연구소 소장 차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