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받는 모성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줄 누이는 없는가?
11월 23일 여성환경연대토론회에서
허라금씨는 여성의 참여도를 높이는 것과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환경운동을 전망하는 것은 구분되어야하지 않는가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나는 이 물음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허라금씨가 물어본대로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환경운동의 지평을 높여줄 운동인가하는 물음을 물어 보아야 하겠다. 그것은 허라금씨가 제기한 바와 같은 제3기 여성환경이론의 특징인 2분법의 해체라는 점에서 기존의 환경운동과 다르게 사물을 봄으로써, 현재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의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데 있다. 또 김양희씨(환경의 이해, 19996년)가 말한 대로 환경운동에서 만큼 페미니즘의 압력이 성공적인 영역이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나는 지금까지의 여성환경운동이 여성의 참여도를 높이고, 남성이 하고 있는 가부장적 조직원리을 가지는 환경운동의 충실한 조언자, 들러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과연 여성의 자리에서 여성환경운동을 한 것은 허라금씨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다. 그러나 대안적인 인식을 가져다주는 환경운동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환경운동 속에서 독특한 여성의 시각이 보여져야겠다. 여성의 눈물과 여성의 비판이 있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성환경이론가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이론가들이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유린에 가슴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또 환경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문제에 대해서 누구 보다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이해의 깊이와 비판을 보여준다. 여성환경운동가의 글에서 가슴과 눈물과 비판의 칼날이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눈물과 사랑은 자연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사랑이다.
나는 언젠가 구두로 여러 분들에게 이야기 드린 내용을 공식적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성환경운동의 다른 내용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여성환경운동가들의 잃어버린 운동의 기회를 말하고자 한다.
여성환경운동가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기회는 황산성 장관이 언론에 의해서 울보로 몰린 사건이라고 본다. 황산성 장관이 1993년 2월 26일 취임이후, 기자들에게 늘 시달려 왔는데, 가장 문제되는 경우 모신문 사설(5월 14일)에서 황산성장관을 “눈물의 황산성. . .“이라고 사설에서 언급한 일이다. 그 사설을 읽어보면, ”황장관 에게는 ‘울보’라는 별명이 붙어 버렸다. 고의인지 버릇인지 그의 ‘공개적 울음 울기’는 그저께 국회에서 또 벌어졌다. 보사위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답변을 하면서 웃음을 남발하자 한 야당의원이 “공식적인 답변이니 정숙하게 말하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회의가 끝난 뒤 불평과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 .황산성씨는 고위 공직자가 마땅히 지녀야할 지성이나 덕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품위’는 아예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 고 그 사설은 쓰고 있다. 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 우는 것이 나쁘다고 보는 것은 감성을 억압하고 열등시하면서, ”싸나이는 울지 않는다“는 성차별적인 문화의 특징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이 우리 나라 여성환경운동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넘어 갔어야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이런 흐름은 손숙 장관이 물러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손숙장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잘 우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호감을 가졌다. 손숙장관에 대해서도 그 분의 과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를 다루는 사설에서 황산성장관을 다룰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6월 24일자). 이 사설은 신임장관이 돈 봉투를 받았다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설을 이러한 지적을 넘어서, 손숙 장관이 ”단순한“ 성격이며, 업무능력이 없다는 지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격에 관해 전반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 신문사에 항의한 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여성환경운동가들이 개고기 식용법제화에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서도 큰 아쉬움을 느낀다. 개고기는 성차별적인 음식이다. 이는 개고기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금기식품이라는 데 있다기 보다는, 여성을 개 패듯이 폭력을 행사하는 전통사 회가 개와 여성에게 순종을 강요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타인을 폭력으로서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누렁이를 보면서 어릴 때 동네에서 폭력을 남자에게 맞기 위해서 잡혀서 억지로 집으로 끌려가는 여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젖소가 새끼를 낳고 나면,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강제로 임신을 시켜서 새끼를 빼는 데 이런 식으로 수년을 계속하여 어미 젖소가 쓰러지게 되면 햄버거의 재료로 쓴다고 한다. 이런 것은 애완견을 낳는 어미 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조그마한 우리에 갇혀서 쉴 수 없이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모성으로서의 존재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로 존엄성을 가진다. 새끼를 배고 낳는 것을 인간의 상업적인 목적으로 약탈하는 것은 끝간 데 까지 간 폭력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모성만이 모성이라고 할 것인가? 이 가엽슨 동물들의 모성은 누가 보호해 줄 까. 이 모성을 위해서 눈물을 뿌려줄 여성은 없는가?
또 이런 문제이외에도 환경운동자체에 숨겨져 있는 기술적 합리성, 인간과 자연의 2가지 잣대 등에 대한 뼈아픈 자성과 바판은 여성환경운동가들에게서 나올 이야기는 아닌가?
최근에 생명복제와 관련한 시민단체들의 근거가 안전성에 있고, 또 동물과 인간에 대한 2중적인 기준과 같은 것은 여성환경운동가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안전하기만 하다면 다른 존재에 대한 폭력이 용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환경운동의 목표가 지금의 문명과 환경운동을 비판적인 문화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운동을 통하여 문화의 폭력성의 정체를 밝히고 맞다뜨리는 것이 아닌가고 본다.
학대받는 모성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줄 누이는 없는가?
11월 23일 여성환경연대토론회에서
11월 23일 여성환경연대토론회에서
허라금씨는 여성의 참여도를 높이는 것과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환경운동을 전망하는 것은 구분되어야하지 않는가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나는 이 물음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허라금씨가 물어본대로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환경운동의 지평을 높여줄 운동인가하는 물음을 물어 보아야 하겠다. 그것은 허라금씨가 제기한 바와 같은 제3기 여성환경이론의 특징인 2분법의 해체라는 점에서 기존의 환경운동과 다르게 사물을 봄으로써, 현재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의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데 있다. 또 김양희씨(환경의 이해, 19996년)가 말한 대로 환경운동에서 만큼 페미니즘의 압력이 성공적인 영역이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나는 지금까지의 여성환경운동이 여성의 참여도를 높이고, 남성이 하고 있는 가부장적 조직원리을 가지는 환경운동의 충실한 조언자, 들러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과연 여성의 자리에서 여성환경운동을 한 것은 허라금씨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다. 그러나 대안적인 인식을 가져다주는 환경운동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환경운동 속에서 독특한 여성의 시각이 보여져야겠다. 여성의 눈물과 여성의 비판이 있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성환경이론가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이론가들이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유린에 가슴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또 환경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문제에 대해서 누구 보다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이해의 깊이와 비판을 보여준다. 여성환경운동가의 글에서 가슴과 눈물과 비판의 칼날이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눈물과 사랑은 자연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사랑이다.
나는 언젠가 구두로 여러 분들에게 이야기 드린 내용을 공식적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성환경운동의 다른 내용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여성환경운동가들의 잃어버린 운동의 기회를 말하고자 한다.
여성환경운동가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기회는 황산성 장관이 언론에 의해서 울보로 몰린 사건이라고 본다. 황산성 장관이 1993년 2월 26일 취임이후, 기자들에게 늘 시달려 왔는데, 가장 문제되는 경우 모신문 사설(5월 14일)에서 황산성장관을 “눈물의 황산성. . .“이라고 사설에서 언급한 일이다. 그 사설을 읽어보면, ”황장관 에게는 ‘울보’라는 별명이 붙어 버렸다. 고의인지 버릇인지 그의 ‘공개적 울음 울기’는 그저께 국회에서 또 벌어졌다. 보사위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답변을 하면서 웃음을 남발하자 한 야당의원이 “공식적인 답변이니 정숙하게 말하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회의가 끝난 뒤 불평과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 .황산성씨는 고위 공직자가 마땅히 지녀야할 지성이나 덕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품위’는 아예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 고 그 사설은 쓰고 있다. 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 우는 것이 나쁘다고 보는 것은 감성을 억압하고 열등시하면서, ”싸나이는 울지 않는다“는 성차별적인 문화의 특징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이 우리 나라 여성환경운동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넘어 갔어야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이런 흐름은 손숙 장관이 물러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손숙장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잘 우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호감을 가졌다. 손숙장관에 대해서도 그 분의 과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를 다루는 사설에서 황산성장관을 다룰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6월 24일자). 이 사설은 신임장관이 돈 봉투를 받았다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설을 이러한 지적을 넘어서, 손숙 장관이 ”단순한“ 성격이며, 업무능력이 없다는 지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격에 관해 전반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 신문사에 항의한 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여성환경운동가들이 개고기 식용법제화에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서도 큰 아쉬움을 느낀다. 개고기는 성차별적인 음식이다. 이는 개고기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금기식품이라는 데 있다기 보다는, 여성을 개 패듯이 폭력을 행사하는 전통사 회가 개와 여성에게 순종을 강요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타인을 폭력으로서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누렁이를 보면서 어릴 때 동네에서 폭력을 남자에게 맞기 위해서 잡혀서 억지로 집으로 끌려가는 여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젖소가 새끼를 낳고 나면,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강제로 임신을 시켜서 새끼를 빼는 데 이런 식으로 수년을 계속하여 어미 젖소가 쓰러지게 되면 햄버거의 재료로 쓴다고 한다. 이런 것은 애완견을 낳는 어미 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조그마한 우리에 갇혀서 쉴 수 없이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모성으로서의 존재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로 존엄성을 가진다. 새끼를 배고 낳는 것을 인간의 상업적인 목적으로 약탈하는 것은 끝간 데 까지 간 폭력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모성만이 모성이라고 할 것인가? 이 가엽슨 동물들의 모성은 누가 보호해 줄 까. 이 모성을 위해서 눈물을 뿌려줄 여성은 없는가?
또 이런 문제이외에도 환경운동자체에 숨겨져 있는 기술적 합리성, 인간과 자연의 2가지 잣대 등에 대한 뼈아픈 자성과 바판은 여성환경운동가들에게서 나올 이야기는 아닌가?
최근에 생명복제와 관련한 시민단체들의 근거가 안전성에 있고, 또 동물과 인간에 대한 2중적인 기준과 같은 것은 여성환경운동가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안전하기만 하다면 다른 존재에 대한 폭력이 용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환경운동의 목표가 지금의 문명과 환경운동을 비판적인 문화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운동을 통하여 문화의 폭력성의 정체를 밝히고 맞다뜨리는 것이 아닌가고 본다.
학대받는 모성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줄 누이는 없는가?
11월 23일 여성환경연대토론회에서